하이텔을 그리며

제5화 기억의 방향

갈등하는 젊은이 2026. 8. 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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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불빛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숲을 훑어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수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빛은 나무를 비추지 않았다.
길도 찾지 않았다.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도 살피지 않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추적하듯 허공을 천천히 스캔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간이 없다."
그는 벽난로 앞으로 달려가 불길을 손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꽃이 손등을 태웠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 속에서 검게 그을린 작은 금속 상자를 꺼내더니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잠금장치는 오래된 다이얼 방식이었다.
그는 번호를 맞추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상자 위에 올렸다.
잠시 후 안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는 오래된 종이뭉치와 손바닥만 한 유리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유리병 속에는 은빛 액체가 아주 조금 담겨 있었다.
"이게 뭐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뭉치를 내게 건넸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는 수백 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는 날짜가 있었다.
어떤 것은 수십 번이나 같은 이름이 반복되어 있었다.
어떤 이름은 단 한 번만 적혀 있었다.
내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 옆에는 날짜 대신 빈칸만 남아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손가락으로 그 빈칸을 만졌다.
순간 머릿속에서 낯선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비가 내리는 골목.
누군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의 감촉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했다.
"보지 마!"
남자가 다급하게 종이를 낚아채는 순간 기억도 함께 사라졌다.
방금 무엇을 본 것인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났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
"기억난 게 아니다."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붉은 불빛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억될 뻔한 거다."
그 말은 이상했다.
기억은 떠오르거나 잊히는 것이다.
'기억될 뻔했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표현이 더 정확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유리병을 들었다.
병뚜껑을 열자 희미한 금속 냄새가 퍼졌다.
그는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혀 내 이마에 작은 점을 찍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이게 무슨..."
"조용."
그는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드론 하나가 집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붉은 빛이 지붕을 스쳤다.
숨소리조차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드론은 잠시 멈추더니 다시 움직였다.
집을 지나쳤다.
남자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효과가 있네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효과가 아니라."
"..."
"착각한 거다."
"무슨 뜻이죠?"
"그들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럼 뭘 찾는데요?"
그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
순간 숲 저편에서 붉은 불빛 하나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다른 드론들도 동시에 그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한곳으로 집중되더니 숲속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금세 끊어졌다.
몇 초 후.
드론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흩어졌다.
나는 얼어붙은 채 남자를 바라봤다.
"방금..."
"봤지?"
"...누군가 있었어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건가요?"
"모른다."
"살아 있는 거죠?"
그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내일이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람 가족들은 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돼."
"그래."
그는 피곤한 얼굴로 벽에 기대앉았다.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사람이 사라졌는데 기억까지 사라진다고요?"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덮이는 거다."
"무엇으로?"
"더 자연스러운 기억으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빈 컵 두 개를 가져왔다.
컵 하나를 뒤집어 다른 컵 위에 포갰다.
"위에 있는 컵만 보이지?"
"고요."
"아래 컵은 없어진 게 아니다."
그는 아래 컵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냥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어릴 적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분명 누군가와 함께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혼자였던 기억.
학교 운동회 사진에서 잘려 나간 누군가.
분명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단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
나는 숨을 삼켰다.
"설마..."
남자는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다.
"생각하지 마."
"..."
"네가 기억하려는 순간."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누군가는 너를 기억하게 된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낡은 집 안에 있던 모든 시계가 동시에 초침을 멈췄다.
장작불도 흔들림을 멈췄다.
빗방울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오래된 다이얼 전화기 하나가 천천히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따르르릉.
남자는 그 전화기를 보자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왜 안 받는 거예요?"
그는 한참 동안 전화기를 바라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은..."
나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전화벨이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전화는 누가 걸고 있는 걸까.
아니.
정말 누군가가 걸고 있는 전화가 맞을까.
어쩌면 저 전화는...
누군가가 받기를 기다리는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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