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텔을 그리며

제2화 오래된 목소리

갈등하는 젊은이 2026. 8. 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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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상하다.
평생 기억할 것 같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반대로 별 의미 없던 장면 하나가 평생 머릿속에 남기도 한다.
나는 그날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거실에 서 있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목소리.
처음 듣는 목소리였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것처럼.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친구들과 동네 뒷산에서 곤충을 잡고 놀다가 길을 잃었다.
산은 크지 않았지만 해가 지자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친구들은 울기 시작했고 나 역시 겁이 났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왼쪽."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왼쪽으로 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친구들을 데리고 왼쪽으로 걸었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등산로가 나타났다.
집에 돌아온 뒤 부모님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까지는.
 
기억은 꼬리를 물었다.
중학교 1학년.
비 오는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평소처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내 가방을 뒤에서 잡아당긴 것 같은 느낌.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덤프트럭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건 누군가가 나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짜증을 내며 주우려던 순간 책장 하나가 무너졌다.
무거운 백과사전들이 방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자리에 쏟아졌다.
부모님은 오래된 책장이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천운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을 수 없었다.
우연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오래된 집 창고에는 부모님도 거의 열어보지 않는 종이 상자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앨범.
유치원 그림일기.
낡은 공책들.
먼지가 가득한 상자를 뒤지던 중 작은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나왔다.
하얀 라벨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1992. 현관.'
왜 '현관'일까.
집에는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가 아직 남아 있었다.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거친 잡음이 흘렀다.
잠시 후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엄마가 말했다.
"혼자 뭐 해?"
어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저씨랑."
엄마가 웃었다.
"무슨 아저씨?"
잠시 침묵.
그리고 어린 내가 말했다.
"전화 아저씨."
순간 숨이 멎었다.
엄마는 장난으로 생각했는지 크게 웃었다.
"전화에서 사람이 나와?"
"응."
"뭐라고 했는데?"
어린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넘어지지 말래."
바로 그 순간.
녹음기 너머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잡음인 줄 알았다.
볼륨을 끝까지 높였다.
"...잘했어."
낮고 쉰 목소리.
익숙했다.
너무 익숙했다.
나는 황급히 녹음을 되감았다.
다시 들었다.
분명했다.
"잘했어."
그 목소리는 최근 몇 주 동안 내게 전화를 걸어오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손끝이 떨렸다.
1992년.
휴대전화는커녕 집 전화도 부모님이 받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일은 최근에 시작된 사건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억이 시작되기 전부터 누군가는 내 삶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여보세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말했다.
"찾았구나."
"...당신,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어?"
긴 침묵.
"네가 기억하기 전부터."
"왜?"
"...아직은 말할 수 없어."
"당신은 누구야?"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어릴 때 잃어버린 빨간 구슬 기억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구슬은 부모님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치원 뒤뜰에서 잃어버렸고, 나는 그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울었다.
세상에 나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의 숨소리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그건..."
말끝이 흐려졌다.
"...내가 주운 거니까."
순간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끊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통화를 차단한 것처럼.
휴대폰 화면은 새까맣게 변했고, 단 한 줄의 문장만 떠올랐다.
통신 오류.
그러나 그 아래에는 일반적인 오류 메시지 대신 처음 보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허용된 개입 횟수를 초과했습니다."
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누군가가 내 삶에 개입하고 있다.
아니.
누군가가 개입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을 받으면서도,
계속 나를 살리려 하고 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건 귀신 이야기도, 환청도 아니다.
누군가가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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