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텔을 그리며

제4화 아날로그 구역

갈등하는 젊은이 2026. 8. 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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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승합차의 문이 하나둘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문 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검은 정장.
같은 시계.
같은 걸음.
그리고 같은 표정.
마치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시스템이 사람의 모습을 빌린 것 같았다.
"뒤쪽으로."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곳.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쪽 벽장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사진 속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말하지 마."
그 한마디만 남긴 채 나와 어머니를 벽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쪽에는 좁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비밀 통로.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현관문이 부서지는 굉음이 들렸다.
"관측 대상 확인."
"기억 회수 절차를 시작한다."
금속성 음성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
 
통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참을 걸어 밖으로 나오자 이미 산속이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은 점점 멀어지고, 휴대전화의 전파도 끊겼다.
그는 그제야 걸음을 늦췄다.
"휴대전화."
나는 아무 말 없이 건넸다.
그는 돌을 들어 휴대전화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액정이 산산조각 나도 멈추지 않았다.
배터리를 분리하고, 회로를 부러뜨리고, 칩을 잘게 부쉈다.
마지막에는 부품들을 서로 다른 방향의 계곡으로 던져 버렸다.
"그 정도까지 해야 해?"
그는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미 늦었지만."
"..."
"조금이라도 늦출 수는 있다."
 
두 시간쯤 산길을 걸었을까.
낡은 기와집 하나가 나타났다.
도시에서 한 시간도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마치 다른 시대 같았다.
전신주가 없었다.
인터넷 선도 없었다.
태양광 패널도 없었다.
CCTV는 물론, 전기 계량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었고, 장독대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던 잡음을 꺼 버린 것 같았다.
남자가 말했다.
"여기는 괜찮다."
"왜?"
"디지털이 없다."
그 말뿐이었다.
 
집 안은 더 놀라웠다.
흑백 텔레비전.
다이얼 전화기.
브라운관 라디오.
필름 카메라.
타자기.
벽에는 1970년대 달력이 걸려 있었고, 손으로 감아 사용하는 시계들이 수십 개나 놓여 있었다.
심지어 냉장고조차 전기가 아닌 얼음으로 냉기를 유지하는 구조였다.
"박물관이야?"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다."
 
그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불꽃이 피어오르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말해 줄 수 있나요?"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낡은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연필과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절대로 이름을 쓰지 마라.'
나는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 막았다.
다시 적었다.
'말도 하지 마라.'
"왜?"
그는 잠시 망설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다."
"누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올려다봤다.
낡은 목조 천장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는 지금 수백억 개의 눈이 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거리의 CCTV."
"자동차."
"드론."
"위성."
"가전제품."
"휴대전화."
"시계."
"안경."
"심지어 아이들 장난감까지."
그는 벽난로의 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빛을 기록하는 모든 것은 연결된다."
 
"하지만 여긴 다르다."
그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이건 필름이 있어야 사진이 찍힌다."
타자기를 가리켰다.
"전기가 없어도 된다."
연필을 들어 올렸다.
"인터넷도 없다."
잠시 침묵.
"그들은 디지털은 감시할 수 있다."
"..."
"하지만 아날로그는 읽지 못한다."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숨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는 내 눈을 바라봤다.
"네가 진실을 알게 되면."
"..."
"그들도 안다."
"무슨 말이야?"
그는 낡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종이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관측된 사실은 고정된다.'
"모르는 일은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문장을 손으로 찢어 벽난로에 던졌다.
"말하는 순간."
불길이 종이를 집어삼켰다.
"기록된다."
"기록되는 순간."
그는 내게 아주 천천히 말했다.
"현실은 하나로 굳어진다."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는 건가요?"
남자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는 게 아니다."
"..."
"삭제되는 것이다."
"누가?"
"..."
"정확히는."
그는 말끝을 삼켰다.
"원래 존재하지 않아야 할 기억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
"당신도 잊게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너무 쓸쓸했다.
"나는 이미 많이 잊었다."
벽난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의 손에는 오래된 상처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총상처럼 보이는 흉터.
칼에 베인 자국.
화상.
그리고 손목 안쪽에는 수십 개의 날짜가 연필로 적혀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 날짜가 뭐예요?"
그는 손목을 감췄다.
"잊지 않으려고 적어 둔 것들."
"무엇을?"
"..."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기억을 지우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먼저 잊혀 가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날 밤.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낡은 집 안에는 장작 타는 소리만 들렸다.
남자는 벽에 걸린 낡은 지도를 펼쳤다.
그 지도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도로도, 도시도, 국경도 지금과 달랐다.
지도 곳곳에는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모두 내가 살아오며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던 장소였다.
산에서 길을 잃었던 곳.
트럭 사고를 피했던 횡단보도.
무너진 책장이 있던 집.
그리고 내가 처음 전화를 받았던 아파트.
그는 마지막으로 지도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무 표시도 없는 곳이었다.
"여기가 시작이다."
"무엇의 시작?"
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네가 태어나기 전."
"..."
"아니."
그는 스스로 말을 고쳐 말했다.
"정확히는..."
벽난로의 불이 갑자기 흔들렸다.
집 안의 모든 시계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를 찾았다."
멀리 산등성이 너머.
붉은 불빛 수십 개가 천천히 숲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었다.
드론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 드론들은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찾듯, 숲을 한 줄 한 줄 훑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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